지리산종주 #1 - Prologue - :: Horizontal Grays S2
어느날 세수를 하고 거울에 비춰진 내 얼굴을 보며 느낀 우울함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지 않구나 하는 슬픔

나의 눈빛은
세상을 가감없이 바라보고 소리치며,
세상과는 물론 스스로와도 타협하지 않는
예리하면서도 맑은 젊은이의 눈빛도 아니고
세상을 이해하고 감싸안고 나긋하게 소리내며,
세상과는 물론 스스로와도 타협할 필요가 없는
온화하면서도 탁하지 않는 어른의 눈빛도 아니었다.

그럭저럭 시대에 휩쓸려, 세상에 속고, 스스로를 속이고
필요치않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필요한 겸양의 마음은 사라지고,
지루해지고.. 나태해지고.. 한심해져
뭉툭하고 탁한 눈빛의 스스로를 보게된 것이다.

아직은 좀 더 힘껏 소리내며 격렬히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갈 것인가.
이제는 지혜롭게 감싸안고 순응하며 조용하지만 힘있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것이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나타하게 살아온 내 삶의 전환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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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입대하기 일주일전 혼자서 훌쩍 떠난 지리산종주길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기억이 문득 떠올라 12년만에 '지리산종주'를 감행하기로 했다.
그것이 전환점이 될 것 같진 않다만 다시한번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뭔가 거창한것 같다만 결론은 그냥 기분전환이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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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산장도 15일전에 예약해야하고 휴식년이라는 것도 생긴듯하다.
무엇보다 10월말이면 춥다는 걸 알기에 산장을 예약했다.
1박2일종주를 목표로하고 숙박일 15일전에 '장터목산장'을 예약했다.
문제는 산장을 예약하느라 온 정신이 팔려서 기차예약을 하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용산역 출발, 구례구역 도착 마지막 차는 용산역에서 22:50에 출발, 구례구역에 03:23에 도착하는 무궁화호이다.
이 열차가 지리산종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열차인데 시간을 최대한 아낄 수 있기 때문일게다.
여튼 이 사실을 깜빡하고선 열차를 예약하지 못했다.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다른 열차를 예약해야했다.
영등포역(18:13) -> 구례구역(22:14) 새마을호 예약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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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등산을 즐겨하거나 하지 않다보니 등산용품같은게 하나도 없다.
남는 시간동안에 하나씩 하나씩 준비한다.
등산화, 배낭, 침낭, 코펠, 버너, 스틱 ...
등산복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신경안쓰다가 출발하기 이틀전에 저렴하지만 바지,셔츠,자켓까지 사는 것을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ㅋ

12년 전에는 책가방에 워커, 카고바지에 청자켓, 침낭도 없이 젊음하나 믿고 겁도없이 혼자 잘도 갔는데
등산용품들을 하나하나 준비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한숨이 나온다.
치기라고 할 지라도 그 파릇한 젊은날의 무모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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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전날 마트에가서 행동식을 사온 후 짐을 하나씩 하나씩 꾸려본다.
이런.. 너무 무겁다.
호기심에 달아본 배낭무게는 거의 15kg에 육박한다. 카메라는 챙기지도 않았는데 --;
슬쩍 겁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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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6 금요일

17:00
회사에 얘기하고 금요일 한시간 일찍 퇴근을 했다.
편의점 사장님 나만한 배낭을 보더니 어디 멀리 등산가시냐고 한다.
버스기사아저씨 자신은 일주일전에 설악산 다녀왔다고 지리산 잘 다녀오라고 한다.
누가봐도 한짐 둘러맨 내 모습은 동네 뒷산을 가는 것 같이 보이진 않나보다.
송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으로 향했다.
용산역에서 내려 간단하게 편의점에서 김밥을 한 줄 먹고 기차에 탑승하기전 티켓을 확인해본다.
그때 시각이 오후 6시 5분 ...

"영등포역(18:13) -> 구례구역(22:14) 새마을호"

나... 왜 용산역에 있는거지?  --;;;;;;;

맘이 급하다. 매표소로 가서 상황을 얘기한다. 방금 그 차 출발했단다. ㅜㅡ
친철한 매표원 22:14 구례구역 도착하는 새마을호를 따라잡을 방법을 얘기해준다.
KTX를 타고 익산역에서 내려서 기다리면 탈 수 있다고한다. (고마웠어요 아가씨~ ^-^)
그나마 다행이다. ^^;;;

20:40 익산역에서 내려 밖에나와 담배를 한대 피우며 갈아탈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돈 더들어 KTX를 타니 시간은 벌어주는구나. 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22:15 구례구역 도착, 공기가 좋아서인지 서늘한 느낌이 좋다.
구례구역에서 이제 터미널을 찾아서 가야 되는데 터미널이 어디였드라?
내가 기억할리가 없다. --a
통상 시골의 경우 역과 터미널이 가까운 경우가 많으니 물어봐서 걸어갈수 있으면 걸어가고
없으면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 버스는 이미 끊겼을듯하고..

근처 슈퍼에서 우유하나 사면서 아주머니께 물어보니 터미널까지 5Km, 버스는 끊겼고
첫차는 새벽 3시 30분에 구례구역에서 터미널로 가는 차가 있다고 한다.
(3:23분 도착해서 지리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을 위한 배려인듯하다.)
역근처는 잠잘곳이 없으니 택시타고 터미널근처로 가서 4시첫차 아니면 6시 차를타고
지리산에 오르면 좋을꺼라고 하신다.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지 여행가이드 울고 갈 정도로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해주신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나와 담배에 불 붙이고 택시를 기다리며 근처를 둘러본다.
구례구역, 예전에는 진짜 조그마한 시골역이었는데 리모델링을 했나보다.
크기도 좀 커지고 건물도 예쁘게 바뀌었다.
그래도 주변에 조그만 식당들 조금 있고 작은 슈퍼 조금 있는 풍경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담배를 다 피우기도 전에 택시가 한대 온다. 불을 끄고 택시에 올라타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여관까지는 300m가량 떨어져 있다고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데려다 주신다고 하신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첫차를 확인하고자하니 터미널로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새벽4시에 성삼재가는 차가 출발하니 걱정말고 밤늦게 고생하지 말고 여관근처로 가라고 하신다.
역시 구례는 지리산종주의 출발지로 유명한가보다.
터미널을 막 지나며 여기서 타면 된다고 알려주신다.

여관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안된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마지막 점검을 하니 12시... 3시에는 일어나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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